[Click 도전 Record(27)] 세계 최초 '아기지문 등록제' 발명한 김정진 박사
군대 재입대 1호, 국방부 1호 특허 등록자로 유명육군 상사에서 전역하자마자 대학 교수로 인생역전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군에서 전역을 한 뒤 다시 입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에 간부 재입대 제도를 제안하고 스스로 1호 재입대자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정진 박사다. 그는 군의 특허 보유가 없던 시절에 1호 특허로 등록했다. 이후 그는 17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아동안전연구소를 운영하며 유아교육과 교수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은 전역하고 다시 입대를 하는 꿈이다. 이 악몽을 제도로 만든 사람이 있다. 간부 재입대 제도를 군대에 제안하고 스스로 1호 재입대자가 된 사람, 바로 김정진 박사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의 재입대는 국가 외환위기(IMF)의 영향도 있었다.

다시 군대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육·해·공군 본부에 전화를 했지만 전역한 간부가 다시 입대하는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육군본부에 '간부 재입대 제안'을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육군본부 실무자로부터 "재입대 제도가 만들어졌으니 재입대 가능합니다"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그는 재입대 제도를 스스로 만들어 다시 군대에 갔다. 현재는 장교 전역자들도 부사관으로 재입대를 하면서 이 제도는 성공적으로 군에 정착되었다. '안되면 되게 하라'를 그는 제안으로 실천했다.
재입대를 한 그의 두 번째 군 생활은 힘들었다. 중사로 전역해서 하사로 재입대를 했으니 예전에는 까마득한 후배를 상급자로 모셔야 했다. 특히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상급자들과 충돌이 잦았다. 그럴수록 업무 외에 무언가 탁월한 자신만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업무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만의 무기, 부대에서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탁월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고민 끝에 부대에서 까칠하기로 소문난 제안왕 C상사가 떠올랐다.
C상사는 분기마다 심의하는 군사 제안에서 매번 채택되어 사령관 표창을 받았다.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 생활 20년을 해도 사령관 표창을 한 번도 못 받는 간부들이 많은데 그는 군사 제안으로 1년에 4번 이상을 받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공무원 제안제도에 해당하는 국방 군사 제안제도를 운영한다. 금상은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포상의 규모가 크고 우수제안자는 진급 때 가산점이 있다. 김정진 박사는 제안을 경쟁력으로 선택하고 까칠한 그 상사와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 C상사의 사무실에 가면 담배 한 갑과 음료수를 건네며 차츰 호감을 샀다. 그의 정성이 C상사에게 전달되었는지 어느 날 "다음 분기 제안 때 공동으로 한번 해보자. 제안 제목은 '00회로카드 개선을 통한 국방예산 절감'이니까 다음 주까지 초안 잡아서 가져와!"라고 했다. 그는 "네! 고맙습니다"라고 우렁차게 답하고 그날부터 기존에 채택된 그의 제안서를 보며 씨름을 했다. 그렇게 완성된 제안서 초안은 C상사에게 무사히 통과가 되었고 사령부에서 채택되었다. 재입대를 하고 3년 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말단 중대의 하사가 별이 세 개인 사령관 표창을 군사 제안으로 받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알거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부대의 모든 업무가 제안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전투복 건빵주머니에는 늘 수첩을 휴대하여 아이디어를 적고 또 적었다. 선후배들과 병사들이 장비 운용을 하면서 쏟아내는 불평불만은 모두가 제안 아이디어로 탈바꿈했다.
'이거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은데……. 이 장비는 회로카드를 교체하지 말고 청계천 가서 콘덴서 하나만 사서 교환하면 개당 250만 원을 아낄 수 있는데…….'라는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군대 제안왕으로 거듭났다.
제안을 거듭할수록 제안제도의 모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에서 우수한 제안을 채택하면 그 제안을 다른 부대에 전파하여 공통적으로 적용해야 하는데 후속 조치가 체계적으로 되지 않았다. 군사 제안제도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제안제도를 넘어서 군의 모든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특허였다. 사실 우수제안 중에는 특허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군의 특허 현황이 궁금해서 국방부에 알아보았더니 특허를 관리하는 부서와 담당자 자체가 없었다. 군의 특허 보유는 0건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랐다. 63만 명의 군인이 쓰는 국방예산만 약 33조.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10% 규모다.
수많은 국방장비와 물자 개발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쓰고 있는데 특허가 없다니? 무기 개발과 전력화에 대한 연구용역이 끝나면 용역회사가 특허를 내는 실정이었다. 나중에 업체로부터 무기를 구매하면 특허료까지 지불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치열하게 특허제도에 대해 공부하였는데, 문득 국방부와 육·해·공군에 국유특허제도를 만들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조직을 구축하는 것과 변리사를 전문사관으로 임관시켜 특허를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이 떠올랐다. 부대 C상사와 함께 고민해서 제안서를 만들어 국방부와 육군에 제안했지만 답변은 '실현성이 없어 불가능하다'였다. 안타까웠다.
이대로 포기해야만 하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꾀를 내었다. 먼저 자비로 군 장비에 관한 특허를 내고 소유권을 국방부에 무상 양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하여 낸 특허는 권리자가 소속 기관 즉 국방부가 되어야 함을 직무발명법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일반기업에서 발명하면 직무발명이 되고 공무원이 발명하면 국유특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월급보다 많은 돈을 들여서 특허를 출원하고 국방부로 무상양도를 하였다. 처음에 국방부 담당자는 무상양도를 안 받겠다고 했지만 "나를 법을 어기는 범법자로 만들 생각이냐"며 법에 근거해서 하는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2009년 8월, 국방부장관 명의의 1호 특허 등록 결정이 났다. 비로소 1948년 창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군은 김정진이 발명한 '통합정비관리시스템'을 국유특허 1호로 등록해 미래 전력의 핵심인 지식재산강군의 포문을 열게 되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가 되었고 그때부터 국방부는 자연스레 특허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특허 보유량이 많아지면 전담 조직과 인력이 생길 거라는 확신으로 계속 특허를 출원했다. 그 결과 어느새 그는 최다 특허등록자가 되었다. 특허 등록이 많아지면서 군에서도 체계적인 특허 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12년에 오랜 숙원이었던 지식재산팀이 육군과 공군에 생겼다. 그리고 변리사관제도가 신설되어 변리사가 장교로 임관하여 의무복무를 하면서 특허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현재 육군이 등록한 특허는 100여건이 넘고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제안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 사물을 보는 눈이 깊어진다. 2007년에 김정진 박사의 딸 지유가 세상에 나온 그즈음, 어릴 적에 엄마를 잃어버리고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외국으로 입양된 K씨의 이야기를 TV에서 보았다. 그날 밤 그는 안타깝고 슬픈 마음에 잠을 못 이루었다.
'한 달 전에도 결혼식에 갔다가 잠시 잃어버려서 속을 태웠는데 우리 딸 지유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일이야. 현재의 미아 찾기 시스템으로는 누구라도 안심할 수가 없어.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없을까?'
미아가 발생하면 아이를 빨리 찾아줄 수 있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안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미아를 찾아주는 시스템에선 주변의 어른이 부모를 잃은 아이를 발견하고 경찰서 또는 미아보관시설로 데려가지만 부모가 그곳으로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며칠 내로 아이는 고아원으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도 부모를 찾지 못하면 새롭게 주민등록을 해서 영영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김정진 박사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딸 지유의 지문이 떠올랐다. 지문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이고 어른이 되어도 패턴은 변하지 않으니 아기 때 지문을 등록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에 따른 지문의 변화를 인터넷에서 확인해보니 역시 지문 패턴은 변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이의 지문을 주민 센터나 경찰서에 등록할 때 부모의 주소와 연락처를 등록하면 손쉽게 미아를 부모에게 찾아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미아 방지를 위한 아기 지문등록제도'이다.
마침 정부에서 제1회 생활공감정책을 공모하던 중이었다. 핵심적이고 간결하게 한 장짜리 제안서를 만들어 제안하였다. 결과는 채택. 제안을 검토한 행정안전부 담당 공무원은 전 세계에서 시행된 적이 없고 미아 방지를 위한 과학적 제안이어서 채택하였다고 말해 주었다. 공공제안에 채택되어 난생 처음 대통령이 주관하는 행사에 초대되었다. 군복을 입고 상을 받으러 청와대 영빈관에 앉아 있으니 꿈만 같았다. '제안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이끌어 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기 지문등록제도는 개인정보 제공 문제로 경찰청에서 시행 여부를 검토하여 2012년 7월 1일부터 전국에 시행되었다. 현재 지문을 등록한 아기가 250만 명이지만 아직 지문 등록을 하지 않은 아기들을 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작년에 아동실종 신고가 2만3000건이었으니 미아 발생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예방이 필요하다. 아직 사전등록률이 36%라고 하니 이 글을 읽으신 독자분들은 주위에 알려서 사랑하는 아이와 부모가 생이별하는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다.
2012년 1월 4일. 그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동아일보와 국방부가 공동 주관한 '제1회 영예로운 제복상'에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재입대를 하고 9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제안으로 많은 상을 받았지만 '영예로운 제복상'은 그 의미가 특별했다. 특별한 상이기에 상금도 좋은 일에 쓰고 싶었다. 마침 푸르메 재단에서 장애어린이 재활병원을 건립하고 있어서 상금의 절반 500만 원을 기부하였다. 제안은 평범한 군인이었던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이후 김정진은 17년의 군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하고 아동안전정책에 대한 전문 역량을 기반으로 아동안전연구소를 운영하며 유아교육과 교수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조영관 도전한국인본부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