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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통한 고객감동' 첫 스토리텔링 시대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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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통한 고객감동' 첫 스토리텔링 시대 열다

[한국의 맛]엄기호 코스카CC 조리장

"고객 앞에서 음식으로 스토리텔링해 성공했지요"


SK최종현 회장 지시로 '슈펙스 김치' 탄생시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충북 음성 코스카CC 엄기호 조리장(58)은 조리사로서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첫 남북정상회담 때 한식조리사로서 동행했는가 하면, SK그룹이 진행하는 각종 행사에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특히 고 최종현 SK회장이 1년 내내 12월 말에 먹는 김장 김치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없느냐는 말에 ‘슈펙스 김치’를 탄생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엄기호 조리장이 돋보이는 것은 조리사로서는 처음으로 스토리텔링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요리를 맡은 엄기호입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고객에게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조리한 요리의 부가가치를 몇십 배로 껑충 뛰게 한다. 외국영화에서 쉐프들이 고객 앞에서 스토리텔링 하듯이 적극적으로 고객과 대면하며 자신의 요리에 대해 설명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물여섯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조리계에 입문, 32년 동안 한식조리사의 길을 걸어온 그는 결국 조리사로서는 최고 명예인 조리명인에 올랐다. 엄기호 조리명인을 만나 첫 남북정상 회담과 슈펙스 김치의 탄생에 얽힌 비화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지난 2000년 6월 15일 1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을 동행해 평양에 다녀오셨지요?

“분단 상황에서 열린 첫 남북정상 회담에 조리사로서 동행한 건 제 요리인생 최고의 행운이에요. 그런데 회담이 결정된 후에도 조리사가 동행할지, 그렇지 않을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 했어요. 정상회담 실무진은 비행기 편으로 평양에 도착했고, 롯데호텔, 신라호텔, 지화자의 대표 조리사와 저는 판문점 육로를 이용해 남한의 식재료를 냉동탑차에 싣고 갔지요.”

-인민문화궁전에서 남측 주최 만찬을 열었는데 어땠습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요리는 먹을 게 없다’고 말할 때 가슴이 철렁했어요. 상차림에 있어서 서양식 연회를 기준으로 한정식이 코스요리로 나갔는데, 한 점씩 나가다보니 그런 인상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날 북한에서 준비한 만찬에서는 찬 음식은 테이블에 먼저 차려놓고, 더운 음식만 내왔어요. 북한식 상차림이 인상적이었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란각에서 평양냉면도 맛보셨나요?

“조리사로서 북한의 음식이 대단히 궁금했어요. 판문점을 거쳐 평양을 갈 땐 커튼을 치고 보안요원들이 철저하게 통제를 했는데, 평양에서는 흰 조리복을 입은 조리사들에게 다소 관대하게 대했던 것 같아요. 모란각에서 정통 평양냉면을 시식하기도 하고 서점에 가 조선료리협회에서 발행한 『조선료리선집』(전4권)을 구해오기도 했지요. 그 요리책을 보면 무려 2200여 가지의 요리를 집대성 해놓아 놀라울 정도입니다.”

-워커힐호텔을 대표해 선발되는데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군사작전처럼 비밀에 부친 채 조리사 선발이 이루어졌어요. 청와대에서 워커힐 사장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 조리사 한 명을 추천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이사나 총주방장의 성은 기억나는데, 당장 조리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해요. 그때 스쳐 지나간 것이 SK행사장에서 늘 ‘오늘의 요리를 맡은 엄기호입니다’고 하던 제 이름이 떠올라 응겹결에 저를 명단에 올렸답니다. 당연히 주방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당시 제 직급이 주임의 위치라 위로 과장, 부장, 총주방장 등 선임들이 줄줄이 있었거든요. 굳게 닫혀 있던 북한 땅을 밟아본다는 기대감에서 시샘도 있었고, 혹시 못 돌아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지요.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뒤 거짓말처럼 저의 운명이 바뀌었어요.”

-조리사는 주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하다보니 고객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엄기호 명인은 고객을 직접 만나 요리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1998년 워커힐호텔에서 까다로운 VIP고객 열 명을 모신 적이 있어요. 3~4일 동안 투숙하며 온달 한정식을 룸으로 서비스해달라고 해요. 한식은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 하는데, 룸서비스를 하는 동안 음식이 식어 제 맛이 나지 않아요. 고객들은 매일 호텔음식이 ‘왜 이렇게 맛이 없냐’며 총지배인과 사장에게 불평하는 바람에 주방에서는 총비상이 걸렸어요. 총지배인이 주방에 와서 마지막날에도 VIP고객의 불평이 이어지면 ‘너희들 다 죽었다고 각오해!’라고 해요. 불행히도 마지막날 룸으로 배달가는 당직이 저였어요.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자고 어떻게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아침메뉴로 주문한 전복죽을 룸이 아니라 버스에서 먹겠다는 전갈이 왔어요. 한참 궁리하던 끝에 외부행사 때 직원의 국을 끓여가는 보온통이 떠올라 거기에 전복죽을 담고 최대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전, 생선구이, 김치 등 밑반찬과 전복죽을 버스에 싣고 식사를 제공하기 전 인사를 한 뒤 ‘오늘 요리를 맡게 된 엄기호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까 고민하다가 새벽에 음식을 준비했는데, 여건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라고 했어요. 식사가 끝날 때쯤 ‘맛있게 드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했는데, 생각도 못한 기립박수가 나왔어요. 호텔에서는 불평불만을 내놓더니 생각지도 않은 버스 안에서 기립박수를 하는 걸 보고 진짜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호텔에 돌아가니 총지배인이 불러요. 어제 어떻게 했길래 VIP고객들이 대단히 만족했느냐며 봉투 하나를 저에게 전해주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를 계기로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오감에다 느낌까지 합해서 육감으로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부터 저는 음식을 손님 앞에 맛있게 차려놓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워키힐호텔에서 그 유명한 ‘슈펙스 김치’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슈펙스 김치는 SK그룹의 제2대 최종현 회장의 지시로 개발됐어요. 미식가이기도 한 최 회장은 ‘어째서 김치 맛을 12월말의 김장김치와 똑같게 할 수 없느냐’고 해요. 그렇게 하려면 김장용 배추를 사야 하고, 김치를 담기에 적당한 12월 5일의 날씨를 유지해야 하고, 김치 맛이 가장 좋은 12월말까지의 보관상태와 비슷해야 한다고 건의했지요. 그랬더니 5년여 동안 약 5억원을 투자해 김치 생산시설과 연구실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슈펙스 김치가 탄생했고, 2008년 6월에는 김치 최초로 HACCP 인증을 획득했고 베이징올림픽 때 지정 김치로 납품하기도 했어요.”

-고 최종현 회장과의 인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시죠?

“최 회장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분으로 요리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어요. 직접 요리를 하지는 않으셨지만 요리에 대해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계셨지요. 1997년 미국에서 최 회장을 모셨는데, 저를 비롯한 조리사를 불러놓고 ‘색(色)의 삼원색을 아느냐? 요리에도 삼원색이 있다. 여러 가지 색이 합쳐지면 검정색이 되듯이 요리에도 너무 많은 양념을 사용하면 음식 재료 고유의 맛은 사라지고 쓴 맛이 난다’고 말씀하셨지요. 실제로 그 분의 말씀대로 음식을 태우면 검정색이 되고 맛도 쓴 맛이 나잖아요. 특히 비즈니스를 위해 전 세계를 다니시면서 각국의 진미를 드신 경험이 있으시니 저희보다 훨씬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요리를 평가하셨던 것이지요.”

엄기호 명인에 따르면 최종현 회장은 당신에게 잘해주기 위해 요리사들이 양념을 많이 넣는 것에 불만이 컸다고 한다. 잘해주려는 과욕(?)이 음식 고유의 맛을 떨어뜨리고 몸에도 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당에 가면 절대로 당신이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는 전언이다.

-그동안의 조리인생을 돌아보신다면….

“경북 문경 산양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건강이상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시골에서 지내다 스물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조리사로서 첫발을 내디뎠어요. 노량진역 앞 연호정에서 아라이(잔심부름꾼)로 근무하며 4개월 만에 노하우를 다 배우고 1980년 이태원 해밀턴호텔 건너편 이원에서 조리사로서의 꿈을 본격적으로 키웠어요. 조리사로서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학식이 풍부한 사장이 저의 성실함을 믿고 인정해준 덕분에 1년만에 주방장이 되어 6년 간 열심히 일했지요. 그때 사랑스런 반려자인 신화자 씨를 아내로 맞이한 게 지금 생각해도 축복인 것 같습니다. 1986년 마포에서 기사식당을 6개월간 운영했으나 경영인보다는 조리사로서의 삶이 제 천직인 것 같아 곧바로 접고 1987년 워커힐호텔에 입사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워커힐호텔에 근무하면서 남북정상회담, 장관급회담, 부시 미국 대통령, 드골 프랑스 대통령, 나까소네 일본 수상 등 각국 국빈을 접대하는 국가행사에 참여했으니 조리사로서는 최고의 홍복을 누렸다고 봅니다.”

-가장 잘 하시는 요리는 무엇인지요?

“궁중 한정식 가운데 곰탕, 삼계탕, 용봉탕, 오합탕, 칠보탕, 해신탕 등 탕 종류를 잘한다고 자부해요. 각종 탕 중에 오합탕과 칠보탕은 제가 이름을 붙이고 개발하여 서울 세계요리 경연에서 금상을 수상했지요. 물론 지금 제가 근무하고 있는 코스카CC에서 인기리에 판매하는 메뉴이기도 합니다.”

-조리사로서 본인의 인생을 요리에 비유한다면 몇 점 짜리 요리가 되겠는지요?

“만 점은 아니지만 최고점인 99점을 주고 싶어요.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고 그게 즐겁고 행복하니까요.”

‘선하고 착하게 살자’는 좌우명을 가진 엄기호 명인.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살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경제위기로 살기가 힘들고 퍽퍽한 이 때 다같이 용기를 내자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집에서 따라해 보는 엄기호 조리장의 비법 2제(題)


♠ 오합탕


■ 엄기호 조리장의 오합탕 레시피(4인분)


자라 1마리, 오골계 1마리, 전복 4마리, 낙지 2마리, 서리태콩 100g, 인삼 5년근 한뿌리, 마늘 8개, 대추 8개, 통밤 4개, 은행 12개, 황기 100g, 엄나무 100g, 소금과 후추 약간

■ 오합탕 만드는 방법


① 자라, 오골계, 서리태콩, 인삼, 마늘, 대추, 통밤, 은행, 황기, 엄나무 등 모든 재료를 깨끗이 손질한다.

② 손질한 모든 재료를 압력솥에 넣고 25분 가량 충분히 끓이고 10분 동안 뜸을 들인다.

③ 위에서 만든 요리를 다시 냄비에 옮긴 다음 전복과 낙지를 넣고 끓이면서 소금과 후추로 맛을 내어 먹는다.

♠ 칠보탕


■ 엄기호 조리장의 칠보탕 레시피(4인분)


토종닭 1마리, 전복 4마리, 산낙지 4마리, 5년근 인삼 1뿌리, 통대추 8개, 통밤 4개, 은행 12개, 마늘 12개, 황기 100g, 엄나무 100g, 찹쌀 150g

■ 칠보탕 만드는 방법

① 찹쌀을 미리 30분 정도 물에 불린 다음 면 자루에 넣어둔다.

② 토종닭, 전복, 산낙지, 인삼, 통대추, 통밤, 은행, 마늘, 황기, 엄나무 등을 깨끗이 손질하여 압력솥에서 25분 정도 끓인 다음에 10분 동안 뜸을 들인다.

③ 위에서 만든 요리를 다시 냄비에 옮겨두고 끓이며 먹는다. 이때 찹쌀은 따로 건져 국물에 죽을 쑤어 먹는다.